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부쿠레슈티 조약 (문단 편집) == 영향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arta_administrativa_Romania_1918_05_07.png|width=100%]]}}} || || 루마니아가 동맹국에 할양한 지역. 군청색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파란색은 불가리아에 할양한 지역이다. 그리고 연두색은 동맹국이 공동관리하는 지역이다. || '''루마니아는 동맹국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미국의 근대 유럽사학자 맥그리거 녹스(MacGregor Knox)는 저서 To the Threshold of Power, 1922/33: Origins and Dynamics of the Fascist and National Socialist Dictatorships 1권 155쪽에서 부쿠레슈티 조약을 체결한 루마니아를 '''semi-colonial dependency''', 즉 '''반(半)식민지적 속국'''이라고 칭했다.] 루마니아의 군사력은 극도로 제한되었고, 하나같이 전략적으로 '''극히''' 중요한 곳들만 할양했다. 카르파티아의 산맥과 도브루자를 빼앗김으로 인해 외침에 대한 자연방벽을 모두 상실했으며, 루마니아의 중심부와 국경선 사이의 간격이 매우 좁아져 심대한 국방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루마니아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자원들의 수탈이 명시될 뿐만 아니라 점령군의 주둔비마저 지불해야 했고, 루마니아의 유일한 [[항구]]인 [[콘스탄차]]마저 동맹국의 관리에 넘어가 독립국으로서 정상적인 교역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사실 베사라비아도 해안에 면하긴 했지만, 그 해안이 죄다 [[늪지]]라서 개발이 어려운 지역이다. 반면에 콘스탄차 일대는 전전에 이미 상당히 개발된 지역이었다.] 심지어 독일에서 비토권과 루마니아측 인사의 해고권을 가진 독일측 인사들을 루마니아 각 부서들에 배치하여 [[내정간섭]]을 하는 등, 독립국으로서 국정을 운영하는 것마저 불가능하게 되었다. 루마니아가 유일하게 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베사라비아와 통일을 인정받고[* 루마니아의 영토 자체는 부쿠레슈티 조약 체결로 오히려 늘었다. 불가리에게 할양된 남도브루자 및 북도브루자 일부의 넓이가 12,296㎢,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할양된 카르파티아 산맥의 넓이가 5,650㎢, 동맹국 공동관리로 넘긴 북도브루자의 넓이가 11,024㎢이니 총합 29,070㎢가 동맹국에게 할양되었다. 반면에 루마니아의 영유권을 인정받은(정확히는 동맹국에게 '''묵인'''받은) 베사라비아의 넓이는 44,442㎢이니, 어쨌건 간에 국토 자체는 분명 전전에 비해 늘었다.] 배상금 포기가 명시되었다는 것 정도. 조약에서 영토가 오히려 불어난 이유는 [[독일 제국]]처럼 루마니아 왕국이 거의 [[단일민족국가]]에 가까운 인구 구성을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1912년]] 조사에서 루마니아인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3.10%으로 거의 단일민족국가에 가까웠으며, 때문에 동맹국이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그리고 [[협상국]]이 [[불가리아 왕국]]을 제외한 나머지 동맹국 국가들에게 쳤던 [[민족자결주의]] 드립이 먹힐 턱이 없었다. 물론 영토를 덜 뜯겼다 뿐이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은 죄다 뜯겼다. [[그러나 이 사진이 표지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이 조약이 실현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루마니아 국왕 [[페르디난드 1세]]는 조약 내용에 격분한 나머지 루마니아 [[하원]]과 [[상원]]에서 모두 비준한 부쿠레슈티 조약을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당시 루마니아 법률상 국왕의 최종 승인을 받지 않은 조약은 효력이 없었다.] 또한 독일의 막장 경제상황과 [[서부전선#s-2|서부전선]]의 패배 소식을 이미 낱낱이 알고 있었으므로, 페르디난드 1세는 조금만 버티면 협상국의 승리가 확실하므로 이런 굴욕적인 내용의 조약은 승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istdob.png|width=100%]]}}} || || 도브루자의 국경 변화. 부쿠레슈티 조약(1918.05)에서 불가리아는 하늘색, 빨간색, 주황색, 핑크색 영역을 할양받았고, 베이지색 영역은 동맹국의 공동관리 지역이 되었다. 베를린 의정서(1918.09) 체결로 베이지색 영역도 불가리아령이 되었지만, 닷새 후 불가리아는 항복하여 동맹국의 뒤통수를 갈긴다(...). || 그리고 조약 내용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마찬가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만 이득보는 내용이 많아서 동맹국의 결속에는 오히려 악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으로 [[불가리아 왕국]]은 루마니아 전선에서 남부 전역을 책임지고(북부 전역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단시일에 루마니아군을 말 그대로 갈아마시는 대활약을 펼쳤지만, 정작 불가리아가 획득한 지역은 [[제2차 발칸전쟁]] 이전에도 불가리아령이었던 남도브루자와 북도브루자 남부의 12,296㎢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불가리아는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면서[* 불가리아는 도브루자 전역의 할양을 요구했다.] 오히려 반독 및 반오스트리아-헝가리 감정이 들끓게 되었다. 불가리아를 어떻게든 동맹국 진영에 붙들어매려던 다른 동맹국은 9월 24일 도브루자의 공동관리 지역도 불가리아에게 할양한다는 내용의 의정서를 체결했지만, 이미 전쟁에 지쳤던 불가리아는 9월 29일에 항복을 선언한다. 종전 직전인 11월 9일, 페르디난드 1세는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루마니아 영내의 동맹국군에게 즉각 철군할 것을 요구했다. 다음날에는 다시 동맹국에 선전포고했고, 부쿠레슈티 조약도 무효화되었다. 전후 루마니아는 [[트리아농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 [[뇌이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와 인구를 2배로 불리는 데 성공했다. [[분류:제1차 세계 대전/조약]][[분류:루마니아의 역사]][[분류:헝가리의 역사]][[분류:독일의 역사]][[분류:1918년 협정]][[분류:헝가리-루마니아 관계]][[분류:루마니아-불가리아 관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